[비즈 사건파일]⑪ 몸에 기름 뿌리고 칼 들고 와도 집행유예로 끝나는 스토킹 범죄… “처벌·구속 강화해야”

2022/09/22 09:26 3.3K
[비즈 사건파일]⑪ 몸에 기름 뿌리고 칼 들고 와도 집행유예로 끝나는 스토킹 범죄… “처벌·구속 강화해야”
지난해 12월 경기 시흥시의 한 주택가에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30대 여성이 자신을 찾아온 전 남자친구 30대 남성 A씨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하며 모친에게 전화하려 하자 A씨가 깨진 소주병으로 자해를 한 것이다. 이후 A씨는 귀가하는 척하며 3시간 뒤에 다시 돌아와 초인종을 누르고, 지포라이터 기름을 자신의 몸에 뿌린 뒤 라이터를 들고 피해자를 위협했다.
사법당국은 같은 달 A씨에게 잠정조치 2호와 3호를 내렸다. 잠정조치 2호는 피해자의 주거지 100미터(m) 이내 접근 금지를, 잠정조치 3호는 전자통신을 이용한 접근을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A씨는 스토킹을 멈추지 않았다. A씨는 잠정조치를 명령 받은 지 이틀 만에 다시 피해자의 주거지를 찾아갔다.
A씨는 특수협박, 스토킹 처벌법 위반, 주거침입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는데 그쳤다. 수원지법 안산지원 재판부는 실형을 선고하지 않은 이유로 A씨가 피해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붓고 라이터를 들고 위협했는데도 직접적인 위해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신당역 살인 사건’으로 스토킹 범죄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죄질이 나쁜 스토킹 범죄에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법조계에선 스토킹 행위 양상에 따라 형량을 높이고, 구속 수사 기준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11월 경기 평택시에서도 스토킹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와 연인관계였던 B씨는 이별 통보를 받자 “2시간 뒤에 칼 가지고 가니까 기다려” “아침 뉴스에 여자친구 죽인 놈 나오더라” 내용의 메시지를 수차례 보냈다. 이어 피해자의 집 공동현관문에 들어섰고, 집 주변에서 미리 준비해 온 공업용 칼을 들고 서성였다.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과 주거침입 혐의로 기소된 B씨가 받은 처벌은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다. 당시 재판부는 “흉기를 소지한 채 피해자를 기다리는 행위로 불안감과 공포심을 일으켜 죄질이 가볍지 않다”면서도 “범행을 자백한 점과 피해자가 피고인에 대한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을 유리한 정상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두 사건을 맡은 재판부는 스토킹 범죄에 대해 “죄질이 좋지 않다”는 공통된 입장을 보이면서도 낮은 수준의 형량을 구형했다. ‘스토킹 처벌법’이 작년 10월부터 시행됐지만, 스토킹 관련 범죄에 대한 사법부의 인식이 여전히 경범죄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법조계에선 스토킹 범죄에 대한 형량이 낮고, 기소가 안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스토킹 피해자가 처벌을 강력히 원하고, 스토킹 기간이 길어도 벌금형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며 “심지어 스토킹 처벌법 위반 혐의를 받아도 재판까지 안 가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된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범인이 스토킹 처벌법 위반 혐의로 검거된 사건은 5248건이다. 이 중 22.7%인 1192명만 기소됐다. 스토킹을 막기 위해 내려지는 잠정조치를 어긴 뒤 구속되는 비율도 낮았다. 작년 10월부터 올해 7월까지 잠정조치 위반 혐의로 가해자가 검찰에 송치된 4016건 중 구속 송치는 238건(5.9%)에 불과했다.
스토킹 처벌법 위반과 관련해 형량과 구속 요건이 모호하다는 의견도 있다. 하진규 법률사무소 파운더스 변호사는 “스토킹 처벌법상 스토킹의 범위가 너무 넓다”며 “스토킹이더라도 협박 내지는 폭행이 섞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구체적인 가해자의 죄질에 따라 처벌과 구속을 강화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스토킹이 재범 가능성이 큰 범죄인 만큼, 구속영장에 대해 조건부 기각을 생각해야 한다는 제안도 있다. 서 이사는 “가해자를 구속한다고 해서 스토킹 범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재범 위험성 등 피해자 안전을 고려해야 한다”며 “스토킹 가해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단순히 기각하지 않고 조건을 부과해 어길 시 구속하는 방법 등 제도가 세밀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