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韓·日 의인들 발굴…“갈등 푸는 건 정치가 아닌 사람”

노치환(왼쪽) ‘아사카와 노리다카·다쿠미 형제 현창회’ 사무총장이 2021년 1월 부산영락공원 내에 있는 고(故) 이수현씨와 부친 이성대씨의 묘소를 찾았다. 노 사무총장 오른쪽은 이수현씨의 모친인 신윤찬씨. /노치환 사무총장
노치환(왼쪽) ‘아사카와 노리다카·다쿠미 형제 현창회’ 사무총장이 2021년 1월 부산영락공원 내에 있는 고(故) 이수현씨와 부친 이성대씨의 묘소를 찾았다. 노 사무총장 오른쪽은 이수현씨의 모친인 신윤찬씨. /노치환 사무총장

“한일 모두 극단적인 정치 세력들이 각자가 하고 싶은 얘기만 하고 있습니다. 한일 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정치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제가 한일 국민들 사이에 ‘공통 분모’가 될 수 있는 의인(義人)들을 계속 발굴하는 이유입니다.”

노치환(60) ‘아사카와 노리다카·다쿠미 형제 현창회’ 사무총장은 5일 본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창회는 지난 4일 한반도 조림(造林)에 앞장선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2~1931)의 아흔두 번째 기일을 맞아 추모식을 열었다. “일본과 특별한 인연이 없다”는 노씨는 2000년대 초반부터 20년 넘게 한일 간 가교(架橋)가 될 만한 역사 속 인물들을 발굴해 추모하고 대중에 소개해왔다.

노씨는 1982년 포철공고를 졸업하고 포항제철(포스코의 전신)에 입사해 기능공으로 일했다. 1992년 상경해 일본 월간지의 한국 지사로 직장을 옮겼는데, 그때 일본 특파원들과 교류하며 자연스럽게 한일 관계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2001년 1월 27일 새벽 창원으로 가는 출장길 고속버스에서 본 신문 사회면 기사가 인생을 바꿔놨다”고 했다. 선로로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고 전동차에 치여 숨진 26세 고(故) 이수현씨를 다룬 내용이었다.

노씨는 “이씨의 숭고한 희생을 보면서 이 사건이 한일 국민들을 하나로 이어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후 ‘이수현 의인문화재단 설립위원회’ 사무총장을 맡아 서울·부산·도쿄 등을 오가며 추모제를 진행했다. 1주기를 전후해 식어가던 추모 열기가 이를 계기로 다시 불이 붙을 수 있었다고 한다. 노씨는 “의인으로서의 이수현은 한국이 아닌 일본 사회에서 발견한 가치”라며 “순수한 민간인으로 이타적 한국 사랑을 실천한 일본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해 발굴에 나섰다”고 했다.

노씨는 “정치·외교 해법도 좋지만 의인들을 통해 선량한 한일 국민들이 서로를 이해할 때 진정한 화해 정신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고 했다. 이런 배경에서 노씨는 일제강점기 한반도 녹화 사업에 힘쓰고 미술품 3000여 점을 수집해 조선민족미술관에 기증한 아사카와 형제에게 주목했다. 매년 4월 망우리묘지에서 열리는 추모식엔 한일 국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추모의 마음으로 하나가 된다. 조선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뒤 조선 고아 1000명을 돌보며 헌신한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1867~1962), 2005년 야스쿠니 신사에 있던 북관대첩비를 한국에 반환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가키누마 센신(枾沼洗心·1932~2009) 등도 노씨가 주목하는 인물들이다. 노씨는 “한일 국민들이 함께 의인의 발자취를 쫓아가는 ‘친구의 길’ 같은 프로그램도 기획하고 있다”고 했다.

노씨의 이 같은 노력을 오랜 기간 옆에서 지켜본 배우자도 최근 “한일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국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싶다”며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사장 심규선)에 100만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지난 3월 정부가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제3자 변제’를 공식화한 이후 포스코와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이 돈을 출연했지만, 개인 명의로 기부가 이뤄진 것은 처음이다. 노씨는 “우리가 진심을 갖고 먼저 통 크게 손을 내밀었으니 일본도 결국엔 호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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