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夜의 시간 끝난 남극은 지금 ‘어둠’을 되찾아가는 중 ”
극지(極地)의 사전적 의미는 ‘맨 끝에 있는 땅’이다. 지구의 맨 끝, 남극은 눈부시게 하얗고 아리게 추운 땅이다. 이곳에서 우리 기상대원 두 명은 일년 내내 상주하며 날씨를 관찰하고 있다. 끝없는 설원이던 남극 땅이 온난화로 바닥을 드러내고, 식물이 자라나며, 해빙(海氷)이 조각조각 나는 작태를 관찰하고 기록해 ‘기후변화’의 객관적 증거를 수집하는 것이다.
남극 세종기지 윤정식(51), 장보고기지 김명운(47) 대원은 15일 본지 이메일 인터뷰에서 “남극에서도 기상대원의 역할은 ‘날씨 예보’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단지 예보 대상만 ‘태풍’에서 ‘블리자드’ 식으로 변했을 뿐, 남극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날씨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일은 똑같다”는 것이다. 보름 전까지 해가 지지 않는 백야(白夜) 속에서 살던 이들은 남극의 여름이 끝나가는 지금 차츰 돌아오고 있는 어둠을 반기며 밤에 적응 중이다.

-남극 과학기지에선 어떤 일을 하나.
(윤정식-이하 윤) “세종기지에선 주로 생태계 중심의 기후변화 반응 등을 연구한다. 세종기지 주변에는 동물들이 많이 산다. 바다에선 혹등고래를, 육지에선 펭귄을 볼 수 있다.”
(김명운-이하 김) “장보고기지에선 빙하 연구 및 기후변화에 따라 ‘지구의 몸’이라고 볼 수 있는 지체(地體) 구조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관찰한다. 하루 4번 기상관측 결과를 극지연구소로 전송하고, 단기·중기 예보를 생산하는 일은 세종·장보고 기지에서 동일하게 진행된다.”
-남극은 단지 춥기만 해서 예보는 오히려 쉬울 것 같다.
(윤) “통상 기상예보는 ‘수치모델 40%, 관측 32%, 예보관 판단 28%’로 이뤄진다. 남극은 작동시킬 수 있는 수치모델이 제한적이고, 관측 환경이 매우 열악해 예보가 더 어렵다. 특히 강한 한파(寒波)와 블리자드가 자주 발생해 관측 자료를 얻기가 어렵고, 수치모델도 정확도를 높일 수 있는 위성 자료가 부족한 편이다.”
(김) “인터넷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자료가 있다고 해도 검토하기 어려운 여건이다. 그래서 남극의 날씨 예보는 예보관 역량이 가장 중요하다. 강한 바람이나 눈보라가 갑자기 찾아오는 때가 잦아서 실황 중심으로 ‘초단기 예보’를 내보낼 때가 많다. 현장 연구대원의 안전을 위해 실시간 모니터링을 통한 신속한 상황 전파가 중요하다.”

-남극에선 어떤 장비로 날씨를 관찰하나.
(윤) “자동관측장비인 ‘AWS’와 일사량을 측정하는 ‘일사계’, 방사선 세기를 측정하는 ‘복사계’ 등 다양한 장비가 있다.”
(김) “10m 높이에 있는 풍향·풍속계가 블리자드나 눈보라, 어는 비 등에 의해 얼어붙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땐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굴착기를 이용해 얼음을 녹여 정비한다. 장보고기지엔 고층기상관측장비인 존데(Sonde·전파를 이용한 기상 관측 기계)가 있다. 이 장비로 남극에 진출한 여러 국가 중 유일하게 오존을 관측하고 있다.”
-남극의 여름이 대원들에겐 가장 분주하다고.
(윤) “남극의 여름은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다. 이때 약 100명의 하계 연구대원들이 현장에 투입된다. 이에 예보 지원 범위도 늘어난다. 세종기지에선 해양 현장 시료 채취 및 연구가 주로 이뤄진다. 그래서 해양 중심의 예보 필요하다. 악(惡)기상이 자주 출현하기 때문에 해상 안전사고 방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
(김) “장보고기지에선 육상 현장 시료 채취 및 연구가 주로 이뤄진다. 땅과 항공 중심의 예보가 필요하다. 장보고기지는 남극 중심부의 매우 강한 한파가 자주 몰아치고, 블리자드 위험도 더 크다. 장보고기지의 연구활동은 ‘1일짜리’부터 ‘한달짜리’까지 다양하고, 프로젝트에 맞게 베이스캠프를 꾸려 운영한다. 이에 각 팀의 연구 여건에 맞게 예보를 내보낸다.”

-혹한으로 인한 위험 상황도 자주 발생할 거 같다.
(윤) “2003년 12월 중국 장성기지에서 물품을 구해 보트를 타고 돌아오던 대원 3명이 블리자드를 만나 보트가 전복되는 사고가 있었다. 실종된 3명의 대원은 극적으로 구조됐지만, 이 대원들을 구조하러 나갔던 전재규 기상대원이 거센 파도에 휩쓸려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세종기지 설립 후 발생한 첫 인명사고였다.”
(김) “작년에 장보고기지 대기과학 대원이 외부 연구동으로 장비 점검을 나갔다가 갑자기 눈보라와 블리자드를 맞닥뜨려 그곳에 3일간 고립된 적이 있었다. 날이 춥다 보니 골절 사고도 자주 일어난다.”
-경칩(驚蟄)이 지나 봄이 온 한국에선 봄꽃 관련 계절관측을 시작했다. 남극에는 계절을 가늠할 요소가 있나.
(윤) “기지별 포인트에 바다가 얼거나 녹는 일자를 기록한다. 세종기지의 경우 식수원인 ‘현대호(湖)’의 결빙을 관측해 식수원이 어는지 확인한다.”
(김) “남극엔 동식물을 통한 계절 관측은 없다. 남극에선 ‘얼음’을 통해 계절을 구분한다. 바다의 결빙·해빙, 바다로 지나가는 유빙이나 빙산을 관측해 계절적 변화를 파악한다.”

-기억에 남는 남극의 기상 현상은 무엇이 있나.
(윤) “추위의 격이 다른 ‘블리자드’를 꼽을 수 있다. 길게는 2~3일, 짧게는 반나절 동안 강한 바람을 동반한 눈이 내리는 현상이다. 남극에 나와있는 대원들의 안전과도 직결되는 문제라서 ‘블리자드형 기압배치’를 파악해 블리자드 발생 가능성을 예보한다. 블리자드가 지나가고 기온이 낮아 담수화 장비가 얼 경우 야외에서 녹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때 블리자드 예보가 필수다.”
(김) “해가 뜨지 않고 밤만 계속되는 극야(極夜) 땐 야외 활동이 제약돼 기지 안에 갇혀 지내야 한다. 다만 극야 때 보는 오로라는 황홀하다. 여름에는 밤이 어두워지지 않는 백야가 찾아온다. 어둠을 잃어버린 백야의 시간이 지난달 끝나고 남극은 차츰 어둠이 돌아오고 있다. 한국에 다시 돌아가도 이 극단적 밤과 낮은 계속 기억날 것 같다.”